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투하쳅스키 (문단 편집) == 생애 == 몰락 [[귀족]] 출신으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근위부대에 입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독일군]]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성 게오르기 [[훈장(상훈)|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1915년]] 독일군에 포로로 생포되었고, 이때 같은 협상국인 프랑스군 대위였던 [[샤를 드골]]을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포로에 대한 대우는 매우 신사적이어서 이 둘은 상당히 편히 지냈지만, 그래도 둘 다 탈출을 시도하여 몇번 실패하였다. 실패할 때마다 장기간 독방신세가 되었지만 이런 처지에서 서로 격려했다고. 투하쳅스키는 [[1917년]] [[8월]] 끝내 --드골을 놔두고-- 탈출에 성공하여 돌아왔다. || [[파일:external/www.pseudology.org/tukhachevsky_mn.jpg|width=40%]] || || 내전 당시 사진. 뾰족모자는 [[세묜 부됸니]] 원수의 이름을 따서 부됸노프카라고 불리며 초창기 붉은 군대의 상징과 같은 모자다. 후에 보온 성능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인해 [[우샨카]]로 대체되었다. ||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혁명으로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러시아 공화국|공화국 임시정부]]가 들어섰으나 [[러시아군]]은 거의 해체상태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여 인심을 잃었다. 이를 틈타 [[1917년]] 10월(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볼셰비키는 [[쿠데타]]를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를 세웠다([[10월 혁명]]). 그렇지만 각지에서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반혁명군이 일어났고, 공산정부는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분리독립을 시도한 소수민족들과 이들을 진압하려는 공산정부 간의 전쟁도 벌어졌고, 협상국은 [[독일 제국|독일]]과 단독강화를 맺으려던 공산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무장개입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내전]]. 다른 귀족 출신 장교들은 대체로 반혁명군을 지지했으나, 투하쳅스키는 의외로 공산정부를 지지하여 볼셰비키당에 가입했고, 곧 [[소련군|붉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초창기에 붉은 군대는 정규군사교육을 받은 자가 드물었고,[* 다만 후에 국방장관 [[레프 트로츠키]]가 대거 러시아 제국군 장교들을 영입하여 붉은 군대 수뇌부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들이 주류가 된다.] 그래서 그는 24세의 나이로 [[군단장]]급의 사령관이 되었다.[* 나폴레옹도 [[프랑스 혁명]] 직후 군에서 장군 상당수가 목이 날아간 상태라 능력을 보이자 초고속 승진, 25세에 대장이 되었다.] 투하쳅스키는 [[모스크바]] 방위사령관, 제5군 사령관을 차례로 맡아 드넓은 러시아를 누비며 각지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 공적으로 붉은 군대의 최고위급에 올랐다. 이때 그의 활약이 눈부셔서 이후 "붉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사이가 나빴던 [[이오시프 스탈린]]조차도 그를 "작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렀을 정도.[* 단, 이 부분은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에서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이 칭찬보다는 경계나 거부감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프랑스 혁명]]을 중요한 전범(典範)으로 삼았고, 따라서 나폴레옹은 영웅이나 위인이 아니라 혁명을 배신하고 군사독재, 더 나아가 제정시대를 연 '유능하지만 부정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 따라서 유능한, 특히 군사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인물을 '나폴레옹'이나 '보나파르트'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 인물의 재능을 높게 평가하는 동시에 군사적으로 혁명정부를 배신하여 무너트리고 독재자로 등극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의 표현이기도 했다고 봐야 한다. 당시 소련 내에서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육해군 최고인민위원으로 [[러시아 내전]]을 지휘했던 [[레프 트로츠키]]같은 인물도 '군사적 보나파르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으며 이것이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등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트로츠키가 아닌 스탈린을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는 것이나 한참 시간이 흐른 일본의 좌파 학생운동권 내애서도 '보나파(보나파르티즘)하지 말라'는 표현이 '독단적으로 굴지 말라'(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잘난척하지 말라)는 의미로 쓰였음도 참고하자.] [[1920년]] 4월 말에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폴란드 전선]]의 주력인 서부전선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냈다. 이후 투하쳅스키는 폴란드군을 수도 [[바르샤바]]까지 밀어붙였다. 그렇지만 쾌진격을 거듭하다 [[공세종말점]]을 넘어선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 전투(1920년)|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에게 취약한 남측방을 강타당한 뒤 포위섬멸됐고, 이때 [[http://pkka1918.egloos.com/m/1194307|패배의 원인]]을 둘러싸고 [[정치장교]]인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사이가 엄청나게 나빠졌다. 이 점이 후에 [[대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사실 바르샤바 전투의 대패는 전선 한참 후방의 민스크에 눌러앉은 채 비현실적인 낙관론에 취해 바르샤바 공격을 밀어붙인 투하쳅스키의 지휘책임이라는 게 오늘날의 평가다. 투하쳅스키는 폴란드로 완벽하게 기운 전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번 더 공세를 계획했다가 [[네만 강 전투]]에서 서부전선군의 잔여병력마저 날려먹었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투하쳅스키는 붉은 군대의 [[총참모장]]이 되어 구태의연한 오합지졸의 의용군을 전문적인 직업장교 하의 현대적인 군대로 탈바꿈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전차]]를 비롯한 [[기갑]]부대와 [[공군]]을 육성하는데 큰 역점을 주었다. 더불어 그 주제와 관련된 여러 책을 써냈고, 이는 소련군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종심작전]] 이론도 이 당시 그와 붉은 군대의 여러 전략전술 전문가들이 창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급진적인 생각이 "붉은 군국주의"로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세묜 부됸니]]와 같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교들의 반대를 받았기에 그는 총참모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들이 그때까지도 기병을 고집하는 구태 장교라는 오해가 널리 퍼져 있는데, 그들도 기병이 시대에 뒤처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며 보로실로프는 최대한 군의 기계화를 지원했다. 투하쳅스키가 비판받은 점은 원수씩이나 되는 인물이 당시 소련의 국력으로는 불가능한 수만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그럼에도 군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똑같이 갖고 있었으며,[* [[겨울전쟁]]에서 [[https://panzerbear.blogspot.com/2015/12/blog-post_7.html|사후평가]] 중 [[바실리 추이코프]]와의 대화를 보면 스탈린은 현대전에 대해 세심함은 상당히 떨어져도 전체적인 통찰력은 갖추고 있던 인물이다.] 당시 막 기지개를 펴던 소련의 중공업들은 우선적으로 현대식 무기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소련은 당시 자본주의 국가들이 연합해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혁명 직후의 간섭전쟁(러시아 내전)처럼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경공업]]과 [[농업]]은 거의 팽개치고 [[중공업]]에만 집중 투자했다. ||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cd4be7636a58aa3f56497eb8fc947bc.jpg|width=300]] || || 원수 시절 초창기의 초상화. || [[1935년]] 반혁명적이라고 폐지되었던 계급이 붉은 군대에 도입되어 그는 [[원수(계급)|원수]]가 되었고 이 해에 그는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서유럽을 방문하는데, 이것이 훗날 망명 중인 반정부 러시아인들을 만났다는 혐의를 받는 원인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새롭게 집권한 [[나치 독일]]의 정보기관들이 공작을 벌여 허위문서를 소련 정보기관에 흘러가게 해서 혐의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 음모론에 따르면, [[OKH]]는 [[독소전쟁]]을 준비하기에 앞서 소련의 군사 이론가들과 장성 대다수를 스탈린이 스스로 숙청시키게 만들어 군사적 능력을 크게 파괴하고자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하일 투하쳅스키였다. 강경한 트로츠키 파벌임과 동시에 군사의 급진적 현대화와 거대화를 주장하며, [[종심돌파이론]]같은 세련된 군사이론을 만들기까지 하는 투하쳅스키는 OKH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이면서 동시에 제거하기 쉬운 대상이었다. 독일은 투하쳅스키를 음해하는 각종 거짓 문서와 정보들을 소련 내로 흘려보냈고 스탈린도 이것들을 접했다. 원래부터 투하쳅스키를 고깝게 보던 스탈린은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음에도 이를 빌미로 투하쳅스키를 제거하고자 하였고, 결국 투하쳅스키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 및 군사적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명분으로 [[대숙청]] 때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독일 정보기관이 스탈린과 NKVD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이 NKVD 요원인 니콜라이 스코블린에게 투하체프스키와 비롯한 몇몇 장군들이 반소련 음모를 꾸민다는 정황을 독일측에 노출시키도록 명령했고 이에 얼씨구나하고 낚인 독일 정보기관이 만들어 뿌린 거짓 증거물들을 입수해 숙청의 빌미로 사용했다는 것. || [[파일:external/incognita.day.kiev.ua/tyxa_s.jpg]] || || 1935년 11월 11일 촬영. || 아무튼 [[1937년]] [[5월 22일]] 그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와 "군사적 트로츠키주의자 음모"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심문이 어느 정도로 가혹했는지 그가 남긴 자술서에는 선혈이 낭자할 정도였다고 한다. 1937년 [[6월 11일]]에 투하쳅스키는 다른 8명의 장군들과 함께 특별군사법정에서 판사들까지 겁에 질릴 정도로 가혹한 재판을 거친 후 밤 11시 35분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 9명은 모두 '''사형 판결 1시간도 안 되어''' 처형되었다.[* 이렇게 상식 밖으로 빠른 속도로 처형이 가해진 이유는 소련의 국민들이 인기 있는 장군들과 전쟁 영웅들을 재판하는 것에 분노할 것이 두려워서 스탈린이 직접 이들을 재판 직후에 처형할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부인과 형제들도 처형당했고 딸은 [[굴라크]]로 갔다. 그가 남긴 "[[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종심전투교리]]" 이론은 반혁명적이라고 폐기되었으나, [[독소전쟁]] 시기에 부활해 훗날 전쟁 후반 독일에 대한 반격작전의 교리가 되었다.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인 후 그는 무죄로 복권되었다. 독일 측이 역공작으로 허위문서를 소련 정보기관에 흘러가게 해서 그에게 혐의가 씌워졌다는 설이 있으나,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문서를 보면 스탈린은 그 역공작 문서와는 관련없이 투하쳅스키를 숙청하려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평소에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었던 탓에 몇 차례 스탈린과 충돌했는데 이 때문에 일찌감치 숙청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1936년에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독일이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공격해올 것이고]] 그로 인해서 [[독소전쟁|매우 오랫동안 큰 희생을 치르는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에 스탈린은 격노하여 "도대체 자네 지금 뭘 하자는 건가? 소련 정권을 위협하는 건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Overy, Richard, The Dictators: Hitler's Germany, Stalin's Russia.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04.] 1986년 사망하는 그날까지 스탈린에게 충성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투하쳅스키의 숙청에 대해 "문제가 있었다면 도대체 어느 쪽에서 시작된 것인가? 그는 위험한 사람이었고 나는 상황이 악화될 경우, 그가 과연 전적으로 우리 편이 될 것인가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는 우파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우익의 위험이 가장 중요한 위험 요소였다. 많은 우파들이 그 자신이 우파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파였다." 라고 평가했다.[* Resis, Albert, ed. Molotov Remembers: Inside Kremlin Politics. Chicago: Ivan R. Dee, 1993.] 비록 귀족 출신이었지만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에 참전하였다는 점을 봤을 때 그가 정말 우파였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지적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스탈린 시대의 "우파"는 당의 정치노선에 별 관심 없는 비정치적 군사 테크노크라트를 포함하는, 지금 보면 황당할 정도로 광범한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몰로토프의 "투하쳅스키 자신은 깨닫지 못했어도 그는 우파였다"는 회고 역시 같은 맥락이다. 스탈린은 계속해서 자신의 파벌이 아니면 온갖 누명을 씌워서 제거해왔고 나라가 무너져도 스탈린을 지지할 정도의 파벌이 아니면 같은 공산당원도 우파라 낙인찍는다고 증언한 것이다. || [[파일:attachment/tukha-3.jpg|width=300]] || || 흐루쇼프 시절 완전히 복권되어 우표 도안의 모델이 된 투하쳅스키. || 한편 실질적으로 붉은 군대를 건설한 [[레프 트로츠키]]는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